프레데리크 바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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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1801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경제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유 무역을 옹호했으며, 정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는 데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경제적 궤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법》 등이 있다. 바스티아는 자유로운 교환을 통한 상호 이익과 연역적 추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오스트리아 학파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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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바스티아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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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클로드 프레데리크 바스티아 |
출생일 | 1801년 6월 30일 |
출생지 | 바이욘 , 프랑스 |
사망일 | 1850년 12월 24일 |
사망지 | 로마 , 교황령 |
국적 | 프랑스 |
정치 활동 | |
직책 | 프랑스 국회 의원 |
임기 시작 | 1848년 |
임기 종료 | 1850년 12월 24일 |
경제학 | |
학파 | 프랑스 자유주의 학파 |
주요 기여 | 약탈적 법률 깨진 유리창의 비유 법 |
영향 받은 인물 | 리처드 코브던 샤를 뒤누아예 장바티스트 세이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볼테르 장자크 루소 애덤 스미스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
언어 정보 | |
프랑스어 이름 | Claude-Frédéric Bastiat |
2. 생애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정치 경제학, 철학, 역사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1830년 혁명의 영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1831년 뮤그롱의 사법관으로 선출되었고, 1832년에는 랑드(Landes)의 지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4] 1848년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전국 입법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4]
경제학자로서 바스티아의 공직 생활은 1844년 ''경제학 저널(Journal des économistes)''에 첫 기고를 하면서 시작되어 1850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4] 그는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자신의 생각을 알리던 중 결핵에 걸렸고, 이로 인해 연설 능력을 잃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법''에서 "죽는 날까지 나는 내 폐의 모든 힘으로 이 원칙을 선포할 것이다(아아! 너무 부족하지만)."라고 썼는데,[5] 이는 그의 결핵 투병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1850년 가을, 바스티아는 요양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고, 로마에서 "진실"이라는 말을 남기고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
2. 1. 출생과 성장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1801년 6월 29일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바욘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 피에르 바스티아는 그 도시에서 유명한 사업가였다. 1808년, 바스티아가 7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5] 1810년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하여 바스티아는 고아가 되었다. 이후 바스티아는 아버지와 함께 뮤그롱으로 이주했으며, 외할아버지와 미혼인 숙모 저스틴 바스티아에게 양육되었다. 뮤그롱에 있는 바스티아 가문의 재산은 프랑스 혁명 중에 획득한 것으로, 이전에는 포야네 후작의 소유였다.[5]
바스티아는 바욘의 학교에 다녔지만, 숙모는 그 학교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 생세베르(Saint-Sever) 학교에 입학시켰다. 17세에 소르즈(Sorèze)의 학교를 떠나 가족의 수출 사업을 하는 삼촌 밑에서 일했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가 파트너였던 회사였다.[5] 바스티아는 삼촌과 함께 일하는 동안 지적인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삼촌과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아했고 파리에서 정식으로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바스티아는 할아버지를 보살폈고, 24세에 할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족 재산을 상속받아 자신의 이론적 탐구를 더욱 발전시킬 수단을 갖게 되었다.[5]
바스티아는 철학, 역사, 정치, 종교, 여행, 시, 정치 경제학, 전기 등 여러 분야에 지적인 관심을 가졌다. 1830년 혁명 이후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1831년 뮤그롱의 사법관으로 선출되었고, 1832년에는 랑드(Landes)의 지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4]
2. 2. 교육과 초기 경력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1801년 6월 29일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바욘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 피에르 바스티아는 그 도시에서 유명한 사업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프레데리크가 일곱 살 때인 1808년에 세상을 떠났다.[5] 아버지는 프레데리크와 함께 내륙 도시인 뮤그롱으로 이주했다. 뮤그롱에 있는 바스티아 가문의 재산은 프랑스 혁명 중에 획득한 것으로, 이전에는 포야네(Poyanne) 후작의 소유였다. 1810년 피에르 바스티아가 사망하여 프레데리크는 고아가 되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와 미혼인 숙모 저스틴 바스티아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바욘의 학교에 다녔지만, 숙모가 그 학교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 생세베르(Saint-Sever) 학교에 입학시켰다. 17세에 소르즈(Sorèze)의 학교를 떠나 가족의 수출 사업을 하는 삼촌 밑에서 일했는데, 그 회사는 그의 아버지가 파트너였던 곳이었다.[5]
바스티아는 삼촌과 함께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파리에서 정식으로 공부하고 싶어 지적인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뮤그롱 재산으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바스티아는 할아버지와 함께 가서 그를 돌보았다. 다음 해인 바스티아가 24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그에게 가족 재산을 남겼고,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론적 탐구를 더욱 발전시킬 수단을 갖게 되었다.[5] 바스티아는 철학, 역사, 정치, 종교, 여행, 시, 정치 경제학, 전기 등 여러 분야에 지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3. 정치 입문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1831년 바욘의 사법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랑드(Landes) 지방 의회 의원이 되었다.[4] 그는 1848년 프랑스 혁명 이후 전국 입법 의회에 선출되었다.[4]2. 4. 입법 의회 의원 및 사망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1831년 바욘의 사법 판사(juge de paix)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현 의회 의원이 되었다. 영국의 곡물법과 관련하여 리처드 코브덴(Richard Cobden)과 반곡물법연맹을 지지했으며, 1846년에는 자유무역협회를 설립했다. 프랑스 학사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이후에는 프랑스 입법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9] 경제학자로서 그의 공직 생활은 1844년에 시작되었는데, 그해 10월 ''경제학 저널(Journal des économistes)''에 그의 첫 번째 기사가 발표되었고, 1850년 그의 이른 죽음으로 끝났다.[4]바스티아는 자신의 생각을 홍보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는 동안 결핵에 걸렸고, 그 병은 결국 그가 더 이상 연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특히 1848년과 1849년에 선출된 입법 의회에서)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는 저서 ''법''에서 "죽는 날까지 나는 내 폐의 모든 힘으로 이 원칙을 선포할 것이다(아아! 너무 부족하지만)."라고 썼다.[5] 번역가들은 이 마지막 줄이 그의 결핵의 영향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한다.
1850년 가을, 그는 의사들에 의해 이탈리아로 보내졌고, 먼저 피사를 여행한 다음 로마로 갔다. 1850년 12월 24일, 바스티아는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침대로 다가오라고 부르며 "진실"이라는 단어를 두 번 중얼거린 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3. 주요 사상 및 저술
바스티아는 경제학 및 정치경제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명료한 구성과 설득력 있는 주장, 그리고 신랄한 재치가 특징이다.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는 바스티아를 "정말 명쾌하고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하며, 그의 수필과 우화가 오늘날에도 보호무역과 모든 형태의 정부 보조금 및 통제를 비판하는 강력한 논거라고 칭찬했다.[4] 그러나 바스티아 자신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인 보조금이 가능하다고 보았다.[6]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수필 모음집인 ''경제적 궤변''[7], 기회비용 개념을 소개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850), 정의로운 법 체계와 자유 사회의 관계를 논한 『법(The Law)』(1850)[11] 등이 있다. 특히 『법』에서 바스티아는 개인의 신체,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유일한 목적이며, 이를 벗어난 정부의 개입은 '합법적 약탈'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그는 합법적 약탈을 "법이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들에게 속한 것을 빼앗아 그것이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보호 관세, 보조금, 누진세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정책이 이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12]
바스티아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이자의 정당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3] 바스티아는 프루동의 반이자 이론을 비판했지만, 프루동은 바스티아를 "논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인신공격을 가했다.[15]
바스티아는 자유 무역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리처드 코브덴과 영국의 곡물법 반대 동맹과 교류하며 프랑스 자유 무역 협회와 협력했다.[4] 그는 자유로운 교환의 이점, 주관적 가치, 연역적 추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오스트리아 학파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17]
주요 저서 목록:
- 『경제적 궤변』(Sophismes économiques, 1845-1848)
- 「촛불 제조업자들의 청원서」(Pétition des fabricants de chandelles, ''Journal des Économistes'', 1845년 10월호 또는 『경제적 궤변』 제7장)
- 『자유경제학 내 탄원서』, 와타세 유우야(渡瀬裕哉) 감수, 퍼시픽 얼라이언스 종합연구소, 2021년
- 『[http://www.gifu.shotoku.ac.jp/kkura/bastiat%20pepetion.pdf 촛불 제조업자 조합의 청원서]』, 구라켄야(蔵研也) 역
- 『자본과 지대』(Capital et rente, 1849)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 1850)
- 『자유경제학 내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와타세 유우야(渡瀬裕哉) 감수, 퍼시픽 얼라이언스 종합연구소, 2021년
- 『[https://kurakenya.hatenablog.com/entry/2019/02/17/17201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구라켄야(蔵研也) 역
- 『경제 조화론』(Harmonies économiques, 1850)
- 『경제조화론』 발췌, 강술 도시키네 시로(土子金四郎) 박사, 철학서원(哲學書院), 메이지 21년
- 『법(La Loi)』(1850), 한국어 번역 [https://libertarian.up.seesaa.net/rand/THE_LAW.pdf pdf]
3. 1. 경제적 궤변
바스티아는 어떤 상점에서 주의가 산만한 아들이 유리창을 깬 사건을 예로 들어, 경제적 궤변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유리창이 깨졌기 때문에 돈이 더 순환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상점 주인은 깨진 유리창을 고치기 위해 유리창을 구매하고, 유리창 가게는 이 돈으로 다른 곳에 투자하여 결국 마을 전체 산업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바스티아는 유리창을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은 경제가 나아졌다고 볼 수 없는 이유라고 지적한다.[20]이 우화는 정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무의미함을 상징한다. 바스티아는 정부의 역할을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스티아는 경제학 및 정치경제학 관련 저술을 많이 남겼으며, 명료한 구성, 설득력 있는 주장, 신랄한 재치가 특징이다. 경제학자 머레이 로스바드는 "바스티아는 정말 명쾌하고 뛰어난 작가였으며, 그의 훌륭하고 재치 있는 수필과 우화는 오늘날에도 보호무역과 모든 형태의 정부 보조금 및 통제를 파괴하는 놀랍고도 압도적인 논증이다. 그는 진정으로 빛나는 자유 시장 옹호자였다"라고 평가했다.[4] 그러나 바스티아 자신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인 보조금이 가능하다고 언급하며, "특별한 상황, 긴급한 경우를 위해 국가는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일부 자원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6]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경제적 궤변''[7]은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수필 모음집이다(원래 ''경제학자 저널''에 게재). 바스티아는 프랑스 공화국 건국자들에게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영국에서 이 책을 썼다. ''경제적 궤변''은 1867년 경제학자이자 화폐사학자인 알렉산더 델 마르가 에밀 발터라는 필명으로 미국 독자를 위해 번역 및 각색했다.[8]
바스티아의 저서 『경제적 허구(Economic Sophisms)』에는 촛불 제조업자와 수지 제조업자들이 프랑스 7월 왕정(1830~1848)의 대의원 의회에 태양을 차단해 달라고 청원하는 풍자적인 우화인 「촛불 제조업자의 청원」이 실려 있다.[9] 또한, 『경제적 허구』에는 당시 일부 사람들이 어려움이 많을수록 일이 많고, 일이 많을수록 부가 많다는 가정하에 모든 사람의 오른손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요구하는 익살스러운 왕실 청원이 포함되어 있다.[10]
3. 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떤 상점에서 주의가 산만한 아들이 유리창을 깼다. 하지만, 그 이후 사람들이 유리창이 깨졌기 때문에 돈을 더 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상점 주인이 깨진 유리창을 고치기 위해 유리창을 사면 유리창을 파는 가게는 유리창을 팔게 되고, 그 유리창 가게는 그 번 돈으로 다른 곳에 투자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결국 마을 전체가 산업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리창을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은 경제가 나아졌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20]이 우화는 정부가 경제를 살리겠다고 돈을 쓰는 일이 부질없음을 상징한다. 그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50년 에세이 "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바스티아는 깨진 유리창의 비유를 통해 사실상 기회비용 개념을 소개했다. 이 용어는 그의 사후 60년이 넘어 1914년 프리드리히 폰 비제르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3. 3. 법 (La Loi)
바스티아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법』(1850년 소책자로 처음 출판)[11]은 정의로운 법 체계를 정의하고 그러한 법이 자유로운 사회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법』에서 바스티아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신체,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이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개인의 힘을 대신하는 공통된 힘"일 뿐이어야 한다. 바스티아에 따르면, 정의(즉, 자신의 생명, 자유, 재산을 방어하는 것)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지만, 정부의 권력이 자선 사업으로 확장될 경우, 정부는 끝없이 성장할 수 있을 만큼 무한해진다. 그 결과로 생기는 국가주의는 "인류의 완전한 무능, 법의 전능, 그리고 입법자의 무오류라는 세 가지 가정에 기반"한다. 그러면 대중은 입법자에 의해 사회 공학적으로 조작되고, "도예가에게 진흙처럼" 입법자의 의지에 굴복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그것이 기원한 고대 사상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사회의 구분을 혼동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정부가 어떤 일을 하는 것에 반대할 때마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가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우리는 국가 교육에 반대합니다. 그러면 사회주의자들은 우리가 어떤 교육에도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국교에 반대합니다. 그러면 사회주의자들은 우리가 종교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국가가 강제하는 평등에 반대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평등에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됩니다. 마치 사회주의자들이 우리가 국가가 곡물을 생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
> 나는 그들이 사회적 결합을 발명하고, 그것을 광고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그들 자신의 비용과 위험으로 그것을 스스로 시도할 권리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이러한 계획을 법 – 힘 – 으로 우리에게 부과하고 세금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지불하도록 강요할 권리에 대해서는 논쟁합니다.
바스티아는 법이 자신의 생명, 자유, 재산을 방어할 권리를 다른 사람의 합법적 약탈 권리를 위해 처벌할 때 타락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합법적 약탈을 "만약 법이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들에게 속한 것을 빼앗아 그것이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면. 시민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법이 한 시민에게 이익을 주고 다른 시민에게 손해를 입히는지 살펴보라"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보호 관세, 보조금, 이윤 보장, 일자리 보장, 구제 및 복지 계획, 공교육, 누진세, 무료 신용 및 공공 사업"에 대한 세금 지원이 포함된다. 바스티아에 따르면, 합법적 약탈은 "무한히 많은 방법으로 저질러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조직하기 위한 무한히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세, 보호, 혜택, 보조금, 장려책, 누진세, 공립학교, 일자리 보장, 이윤 보장, 최저임금, 구제 권리, 노동 도구에 대한 권리, 무료 신용 등등. 이 모든 계획들은 합법적 약탈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진 전체 – 사회주의를 구성합니다." 바스티아는 다음과 같은 유머러스한 지적도 했다. "만약 인류의 본성이 너무 나빠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면, 이러한 조직자들의 경향은 항상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입법자와 그들이 임명한 대리인들도 인류에 속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들 자신이 인류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진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믿습니까?"[12]
3. 4. 바스티아와 프루동의 논쟁
바스티아는 1849년부터 1850년까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이자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13] 로베르 르루가 주장했듯이, 바스티아는 프루동의 반이자 이론이 "어떤 진지한 접근 방식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14] 프루동은 격분하여 인신공격에 의존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의 지능은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깨어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철학도, 과학도, 인간성도 없습니다. 당신의 추론 능력, 주의 집중 능력, 비교 능력은 모두 제로입니다. 과학적으로, 바스티아 씨,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15]4. 사상적 영향 및 평가
바스티아는 정부의 유일한 목적은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며, 정부가 개인의 다른 사적인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위험하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바스티아는 정부의 힘과 법을 이용하여 한 개인에게서 다른 개인에게 무언가를 빼앗는 합법적인 약탈을 조장할 경우 법이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16]
《법》에서 바스티아는 특권 계급이나 사회주의자들이 정부를 합법적인 약탈에 이용한다면 다른 사회경제적 계급도 합법적인 약탈을 이용하도록 부추길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에게 대한 올바른 대응은 모든 합법적인 약탈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스티아는 또한 사회주의 정책을 조장할 경우 법이 생명, 자유,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어떤 집단이든 합법적인 약탈을 얻는 데 사용될 때 법은 그것이 방어해야 할 유일한 것들(생명, 자유, 재산)에 대해 왜곡된다고 말한다.[16]
바스티아는 자유 무역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리처드 코브덴과 영국의 곡물법 반대 동맹과 활발하게 서신을 교환했고, 프랑스의 자유 무역 협회와 협력했다.[4]
자유로운 교환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 주관적 가치, 그리고 경제적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어서 수학적 모델이 아닌 연역적 추론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바스티아는 마크 손튼, 토마스 디로렌조 등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오스트리아 학파의 선구자로 묘사되어 왔다. 손튼은 인간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는 두드러진 "오스트리아 풍미"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17]
5. 저서 목록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1848년 | 소유와 법, 정의와 형제애 (Propriété et loi, Justice et fraternité) | |
1849년 | 국가, 저주받은 돈 (L'État, Maudit argent) | |
1849년 | 의회의 회계 부정 (Incomptabilités parlementaires) | |
1849년 | 평화와 자유 또는 공화국 예산 (Paix et liberté ou le budget républicain) | |
1849년 | 보호무역주의와 공산주의 (Protectionisme et communisme) | |
1983년 | 경제 저술집 (Oeuvres économiques) | 플로랑 아프탈리옹(Florin Aftalion) 편, 자유무역 (Libre échange) 시리즈 |
2005년 | 경제적 허구 (Sophismes économiques) | 미셸 레테르(Michel Leter) 서문, 자유주의 고전 문고 (Bibliothèque classique de la liberté) 시리즈 |
2009년 | 팸플릿 (Pamphlets) | 미셸 레테르(Michel Leter) 서문, 자유주의 고전 문고 (Bibliothèque classique de la liberté) 시리즈 |
1845년-1848년 | 경제적 궤변 (Sophismes économiques) | |
1845년 | 촛불 제조업자들의 청원서 (Pétition des fabricants de chandelles) | Journal des Économistes 1845년 10월호 또는 『경제적 궤변』 제7장 |
2021년 | 자유경제학 내 탄원서 | 와타세 유우야(渡瀬裕哉) 감수, 퍼시픽 얼라이언스 종합연구소(パシフィック・アライアンス総研株式会社) |
구라켄야(蔵研也) 역 촛불 제조업자 조합의 청원서 | ||
1849년 | 자본과 지대 (Capital et rente) | |
1850년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 | |
2021년 | 자유경제학 내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 와타세 유우야(渡瀬裕哉) 감수, 퍼시픽 얼라이언스 종합연구소(パシフィック・アライアンス総研株式会社) |
구라켄야(蔵研也) 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
1850년 | 경제 조화론 (Harmonies économiques) | |
메이지 21년 | 경제조화론 발췌 | 강술 도시키네 시로(土子金四郎) 박사, 철학서원(哲學書院) |
1850년 | 법 (La Loi) | [https://libertarian.up.seesaa.net/rand/THE_LAW.pdf 한국어 번역 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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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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